조단 갤러리

제목: 우리가 기다렸던 영웅, 박태환
이름: 曺 端 * http://www.zoqmin.com


등록일: 2008-08-16 10:25
조회수: 2315 / 추천수: 344


박태환에게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지난 10일 한국 올림픽 출전사상 최초로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딴 그는 13일에도 자유형 200m에서 미국의 수영황제 마이클 펠프스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했다. 자유형 400m 경기는 워낙 박태환의 주 종목인데다 기록 역시 펠프스에 앞선 상태였다. 자유형 200m 경기의 경우, 박태환 자신이 “펠프스에 비하면 나는 아직 갓난아기”라는 말로 미리 예방주사를 놓아준 탓인지 다른 종목에서 은메달에 그쳤을 때와 달리 뒷맛이 개운하다. 약관의 그에게는 세계제패의 가능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박태환은 2008 베이징올림픽의 영웅이다. 자유형 1500m 경기가 남아있으나 이미 치른 두 경기만으로도 그는 무더위에 지친 국민들에게 충분한 청량감을 선사했다. 박태환 이외에 치열한 투혼으로 메달을 딴 유도·양궁 등 다른 종목의 선수들이나 비록 메달을 못땄지만 무수한 땀방울을 흘리면서 각고의 시간을 보냈을 선수들을 생각하면 그만을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 국민이 박태환에게 열광하는 심리에는 자부심과 불안이 교차한다.


그는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한국경제의 결실이다. 다섯살난 꼬마였던 그는 천식 치료를 위해 동네 수영장에 다니면서 천부적 재능을 발견했다. 수영이 여름 한철의 유흥이었던 과거를 벗어나 사시사철 수영할 수 있는 스포츠클럽이 확산되면서 박태환이란 수영천재가 탄생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때 수영강습비가 없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강남 스타일’의 체격 좋고 잘 생긴 청년이다. 근대 이후 늘 콤플렉스의 대상이던 백인들과 맨 몸으로 경쟁해서 승자가 된다는 건 그동안의 열패감을 한 방에 날려주는 효과를 갖는다.

서구의 식민지배가 본격화할 무렵, 골상학이란 것이 있었다. 비서구 원주민의 신체 크기와 능력을 측정해 진화의 정도를 가늠하고 거기에 기반해 통치의 정당성을 찾는 학문이다. 이제 골상학은 사라졌지만 백인의 신체에 대한 열등감은 여전하다. 그런데 박태환이 서구 선수들보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으로 더 높은 기록을 냈을 때 그의 작은 몸은 삼성·LG의 극소전자기술처럼 우월감의 근거가 된다. 워터큐브에 모습을 드러낸 ‘얼짱’ ‘몸짱’ 박태환은 긴장감을 덜기 위해 헤드폰을 끼고 있는데 그의 MP3에는 2000여곡의 가요가 들어있다고 한다. 이는 한국 대중문화의 개가, 즉 중국을 휩쓸고 있는 한류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연상시킨다. 박태환의 승리 이후 그의 신체치수, 훈련기법이 유독 과학적 용어로 설명되는 것은 이런 이미지 때문이다.

박태환의 영웅화는 이처럼 한국경제의 자부심인 동시에, 현재의 위기상황에 대한 불안을 투사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와 한국축구대표팀은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주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그후 6년간, 우리 사회는 난세라면 난세였다. 노무현의 진보정권과 이명박의 보수정권은 둘 다 지지계층을 실망하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국론분열과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었다. 최근의 끝모를 유가인상 행진, 그로 인한 물가상승과 서민경제의 피폐는 종종 IMF의 악몽을 다시 입에 올릴 정도다. 그런 만큼 푸른 물살을 가르는 19세 청년의 힘찬 어깨에 우리 자신을 기대어 새 희망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올림픽 이후다. 골치 아픈 현실의 문제들은 HDTV 화면이 뿜어내는 올림픽의 웅장한 스펙터클에 가려졌다. 그렇게 절박하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도 먼 과거의 일처럼 뇌리에서 지워졌다. 촛불시위의 감격은 추억이 돼간다. 올림픽이 선사하는 현란한 인체의 동작과 전광판의 숫자들은 그만큼 위력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엄혹한 삶과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가 소수민족 탄압을 빌미로 그루지야를 침공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외신이 올림픽 경기실적 뒤에 잠깐씩 나온다. 정부의 방송장악, 공기업 개편, 보은인사 등의 상황도 심각하다. 올림픽이 끝나면 우리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단꿈의 끄트머리에 그것이 꿈임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깨어나기 싫은 가수면 상태로, 오늘도 TV를 지켜본다.


<한윤정/ 경향신문 문화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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