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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북한기(遊北漢記) - 이익(李翼)
이름: 曺 端 * http://www.zoqmin.com


등록일: 2007-11-10 09:21
조회수: 2535 / 추천수: 292


유북한기(遊北漢記)

- 이익(李翼)



  숙종 38년(1712년)에 북한산성을 축성하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었으니, 대개 도성이 사산사전지지(四散四戰之地) 에 있어 급박한 일이 생겼을 때 지킬 수 없고, 남한산성은 물에 막혀 갑자기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봄에 역사를 일으켜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마쳤다. 내가 이에 가서 유람했다. 새로 쌓은 성첩은 까마득하여 잡고 오를 수 없을 것 같았고, 뚫어서 터놓은 평평한 길은 말을 나란히 하여 달릴 만하였다. 대개 성 둘레가 거의 30리이니, 사람의 발길이 들어갈 만한 곳에는 모두 성곽이 둘러 처져 있었다.

  북쪽은 백운봉(白雲峯)에서 동쪽으로 옛 성터까지 뻗었고, 다시 나한봉(羅漢峯)을 거쳐, 서쪽으로 중흥동(中興洞) 입구에서 만나니, 참으로 이른바 백이산하(百二山河)로 하늘이 만들어준 요새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곳은 옛날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나라를 일으킨 곳으로, 열 명의 신하와 함께 한산(漢山)의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으니, 바로 지금의 백운봉이다. 마침내 위례(慰禮)에 도읍을 정했다가, 그 뒤에 남한(南漢)으로 옮겼다. 비류왕(比流王)에 이르러 왕의 서제(庶弟)인 내신 좌평(內臣佐平) 우복(優輻)이 북한산에 웅거하고서 배반하니, 왕이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년)에 다시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개로왕(蓋鹵王) 21년(475년)에 이르러 고구려가 몰래 승려〔浮屠〕 도림(道琳)으로 하여금 왕을 모시게 하였다. 도림이 왕에게 말해서 궁실을 수리하고 성곽을 쌓게 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모아 성을 쌓으니, 창고가 바닥나고 백성들은 곤궁해졌다. 도림이 도망하여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자, 고구려가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함락하고, 왕을 잡아 해치니, 왕자 문주(文周)가 웅진(熊津)에서 즉위했다. 이것이 그 고사이다.

  고구려가 공격하여 함락시킬 때, 그 북성(北城)을 쳐서 7일 만에 무너뜨리고, 남성(南城)으로 옮겨서 쳤다고 한다. 지금 성의 남문 밖에 다시 골짜기 하나가 있는데, 도성과 이어져 있으니, 또한 반드시 여기에 내곽과 외곽을 지어야 할 형세가 심하다. 들으니, 어떤 자가 여기에 대해 의논했다고 한다. 대개 이곳에 있는 자는 대포와 화살의 이기(利器)가 필요치 않고, 몽둥이를 만들고 돌을 던지면 되니, 높은 담에 올라 맹수를 때려잡는 것이다. 또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는 동치(東峙)와 제항(梯航) 해야 하는 서주(西湊)는 마치 쓰는 데 다 방법이 있듯, 발이 많이 달린 형세이다. 그러나 수구(水口)의 문이 매우 낮고 평평해서, 높은 사닥다리와 빈 수레를 이용하여 더위잡고 오를 수 있다.
  안은 매우 급하게 움푹 들어가서 거의 평탄하고 넓은 곳이 없으니, 혹 빗물에 씻겨 무너지면 많은 사람들이 발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또 높은 봉우리와 맨 꼭대기는 가뭄이 들면 필시 물을 운송하기가 어려울 것이요, 날이 추우면 동상에 걸려 수비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것이 그 이로움과 해로움이다.
  성은 겨우 역사가 완성되었으나, 궁실은 아직 짓지 못했다. 비축한 것이 충분하지 않으니, 민심이 쉽게 흩어지고, 국용(國用)이 넉넉하기 어려워, 수십 년의 장구함을 기약할 수 없으니, 불의의 사변〔不虞〕에 힘을 빌릴 수 없다. 장차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빨리 완성하고자 한다면, 이는 또한 넓적다리 살을 베어 배를 채우는 것일 뿐이다.
  비록 위성(衛城)은 갖추게 되더라도, 적을 막을 군사가 없을까 걱정된다. 또 예로부터 성을 빼앗긴 자는 대부분 소홀히 여겼던 곳에서 근심이 생겼으니, 병자년(1636)에 강화도가 함락된 경우가 이것이다.

  천험(天險)의 요새지는 믿을 만하지만 또 두려워할 만하니, 수령직에 있는 자의 처신이 어떠해야겠는가? 이 성이 비록 결함이 있다고 했으나, 도리어 백제왕이 백여 년간 터전을 굳힌 곳으로, 삼국이 서로 공격하여 싸울 때, 고구려와 서로 미워하여, 진실로 일찍이 성 아래 주둔하여, 그 위엄을 확장했다가, 어둡고 나약하며 방종하여 욕심을 따르는 임금에 이른 뒤에야 패했으니, 어찌 성의 죄이겠는가?
  조정에서 시설하는 바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은 시급한 일이니, 대개 백제 개로왕이 망한 것은 꼬드겨 부추기는 사람의 말을 듣고 패망할 기미를 잊어서, 궁궐을 높이고 대관(臺觀)을 꾸미며, 욱리하(郁里河)에서 석곽(石槨)을 가져와 선왕을 장사지내기도 하고, 사성(蛇城)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 북쪽까지 하수를 따라 제방을 쌓기도 하여, 마침내 국세(國勢)가 위태로워져 적의 계략이 이루어진 것이다.
늦게 뉘우쳤으나 어쩔 방법이 없었고, 그 자신은 도망한 죄인에게 죽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해서 간사한 인간을 신용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힘껏 싸우겠는가?”
라고 하였다. 아, 깨달았으나 무슨 소용 있는가? 백제가 뿌리가 단절되지 않은 것이 또한 다행이니, 이를 거울삼아 경계해야 한다.
대저 옛것에 얽매이는 자는,
“덕에 있지 지세의 험준함에 있지 않다.”
라고 하고, 지엽적인 것을 믿는 자는,
“우선 지형을 차지해야 한다.”
라고 하니,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양(梁)나라는 궁궐을 짓다가 백성이 먼저 흩어졌고, 거(莒)나라는 대비 없이 지내다가 초 나라가 운(鄆) 땅에 쳐들어왔다. 그러므로 어찌 다만,
“저기에 있고 여기에 있지 않다.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상(子常)이 영(郢) 땅에 성을 쌓자, 심윤수(沈尹戍)가 수비가 너무 작은 것을 기롱했고, 진(晉)나라에서 포(蒲) 땅과 굴(屈) 땅에 성을 쌓자, 사위(士蔿)가 군대 없이 성을 쌓는 것을 경계했으니, 이것은 또 나라의 운명을 맡은 자가 몰라서는 안 된다.
내가 중흥사(中興寺)에 이르러 하루 머물러 자고 다음날 아침 동반자 두셋과 노적봉을 거쳐서 북성에 올라, 인수봉(仁壽峯)을 바라보고, 백운중대(白雲中臺)에 이르렀다가 길이 위태로워 멈추었다.
절로 돌아와 쉬다가, 수구문을 따라 돌아왔다.
그 산천의 모습은 전에 놀러갔다 쓴 소기(小記)에 자세하게 적었으므로, 또 기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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