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단 갤러리

제목: 그레그는 왜?
이름: 曺 端 * http://www.zoqmin.com


등록일: 2010-09-09 13:23
조회수: 2649 / 추천수: 309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의 결과에 대한 해설을 하려고 정세토크를 며칠 늦췄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직 열리지 않고 있어서 다른 주제를 가지고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북한에 나포됐던 대승호가 7일 돌아왔습니다. 대승호 송환 문제 때문에 개성에서 사실상 당국간 물밑대화가 실질적으로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적십자사가 8월 26일 북한에 수해 복구 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는데 북쪽에서 답이 없었어요. 30일에 다시 100억 원 상당의 지원을 할 수 있다고 액수까지 명시했더니 4일 답이 왔습니다. 기왕 줄 바에는 쌀과 굴삭기, 시멘트를 달라고 일종의 역제의를 했습니다.

정부는 북한의 역제의 사실을 밝히지 않고 고민하다가 북쪽이 6일 대승호를 보내주겠다고 발표하니까 바로 그 다음날 북한의 요구 사항을 공개했어요. 그런 정황으로 볼 때 개성에서 실질적인 접촉이 있지 않았겠나 하는 추정을 해봅니다. 대승호 선원 문제만 가지고 접촉하진 않았을 거예요.

앞으로 남북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풀려갈 조짐이라고 봅니다. 과거의 예를 보면, 남북대화는 적십자 차원의 실무접촉으로 시작해서 점차 '레벨 업(level up)' 됩니다. 나중에는 적십자의 옷을 벗고 당국의 옷을 입고 만나는 식으로 대화가 발전했습니다. 1970년대 초 남북대화가 처음 열릴 때 그랬고, 80년대에 랑군 사건이라는 불행한 일이 있고 난 후에 남북관계가 복원될 때도 수해물자 지원을 구실로 적십자회담부터 시작해서 당국간 경제회담, 국회회담까지 했어요.

정부 고위당국자가 5일 민간 차원의 쌀 지원을 허용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지금 복기해 보니까 아마도 개성에서의 접촉 과정을 감안해서 나온 발언 같습니다. 쌀을 받고 싶다는 북쪽의 요구가 간절했기 때문에 일단 민간 차원의 지원부터 풀어 주고, 적십자 차원에서도 줄 수 있다는 쪽으로 갔을 겁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8일 국회에서 대규모 식량 지원은 어렵지만 적십자를 통한 긴급구호 성격의 쌀 지원은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어요. '적십자를 통한 긴급구호'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당국 차원의 지원입니다. 적십자는 어차피 전달 통로예요. 과거에도 차관 제공 형식으로 쌀을 줄 때는 정부가 직접 했지만, 무상으로 줄 때는 적십자 통로를 이용했어요. 적십자가 돈을 모아서 주는 게 아니라 통일부가 운용하는 남북협력기금으로 쌀이나 비료를 사서 보냈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얘깁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앞으로 우리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월 하순 쯤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하면 북한이 호응해 올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산가족 상봉을 딱 한 번 했는데, 그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작년 8월 북쪽에 가서 합의해 온 5개항 중에서 정부가 마지막에 있던 이산가족 상봉만 달랑 빼먹고 만 거였어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을 작년까지 총 17회를 했는데, 분명히 얘기하지만 그건 쌀과 비료 지원에 대해서 북한 나름의 보답 형식으로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작년엔 공짜로 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북한 입장에서 볼 때는 남쪽이 자기들한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대승호까지 비교적 순순히 보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 쌀 지원이 이뤄진다면 그런 분위기를 타고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해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반도 정세가 그럭저럭 관리되고, 11월 G20 정상회의도 잘 치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 최근에 들은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가 1일 <뉴욕타임스>에 기고를 했습니다. 러시아가 전문가들을 한국에 보내서 천안함을 조사했지만 그 결과를 발표하지 않는 것은, 그걸 공개하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정치적인 타격이 되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당황스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는 러시아 소식통의 말을 전했습니다. 며칠 후에 한국 언론하고 인터뷰를 하면서는 천안함이 사고(accident)로 침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보다 더 상세한 얘기가 오는 23일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나올 것 같습니다. 미국 외교협회(ACFR)란 단체의 앨라배마 지부가 세미나를 개최하는데 그레그 전 대사한테 30분을 줬어요. ACFR은 상당히 보수적인 외교 전문가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참석해서 발표를 하라고 하니까 그레그가 이런 질문을 했대요. '당신들 같이 보수적인 사람들의 모임에서 내가 천안함 얘기를 해도 되겠냐? 그래도 괜찮겠냐?' 그랬더니 CRF 쪽에서 '괜찮다. 그래도 들어야겠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레그 전 대사의 세미나 발표는 비보도를 전제로 한 건데요, 비보도라는 건 발표 순간에만 지켜지는거지 그걸 듣고 나온 사람들을 통해 이런 저런 방식으로 흘러나오고 기사화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레그가 천안함에 대해 발언을 하는 목적은 한국 정부를 어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미국이 또 다시 수렁에 빠지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진실을 얘기하겠다는 거예요. 그레그가 자기와 가까운 한반도 문제 연구그룹 친구들과 주고받은 얘기를 들었는데, 그 사람들의 생각은 대충 이런 거랍니다.

'미국이 60년대 중반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베트남 전쟁을 확대했고 2003년에는 대량살상무기를 구실로 이라크 전쟁도 벌였지만, 그건 상대방을 악마로 규정하고 짜 맞춘 정보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결국 미국에 재앙을 가져왔을 뿐이다. 지금 미국이 천안함 사건 이후 이명박 정부의 북한 때리기에 협조하고 있는데, 앞으로 미국에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다. 정부가 잘 못되는 쪽으로 가고 있을 때 그걸 바로 잡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동북아정책 현장에 있던 우리가 진실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레그가 그 정도로 각오하고 움직인다면 이제 우리 정부가 수습해야 합니다. 그레그의 입을 막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입을 막을 수도 없죠. 천안함을 뛰어 넘으라는 얘깁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7일 "모르는 사이도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만나 물어보고 싶다. 토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레그가 그간 보여 온 모습이나 미국 내에서의 한반도 관련 그의 입지·위상을 봐서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설득한다고 해서 입을 닫을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국회가 증인으로 부르면 올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레그가 요즘 파문을 일으키니까 유엔 주재 한국 대표부의 고위 관계자가, 익명이어서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한 햇볕정책의 전도사 같은 인물로 일방적인 시각에서 상황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까지 했더군요.

그레그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에 주한 미국 대사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 뒤에도 아버지 부시하고 계속 교류를 해오고 있습니다.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에 그레그가 아버지 부시한테 '대통령이 저러면 안 된다'고 계속 입력을 시켰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잘 안 들었다지 않아요. 그래서 '아버지도 아들은 어쩌지 못 하더라'는 말까지 하기도 하더군요. 어쨌든 그레그는 지한파 인사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의 국익부터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중앙정보국(CIA) 출신이기 때문에 정보도 많고, 지금도 정보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하고 관계가 생긴 건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그레그가 CIA 서울 책임자로 있으면서 납치사건이 터지니까 미국 정부가 개입해서 문제를 풀도록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레그가 진보적인 성향이라거나 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책 노선을 지지해서 그랬던 게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미국적 가치의 입장에서 볼 때 잘못된 일이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겁니다.

그레그가 햇볕정책 지지자라서 지금 저러고 있다고 말하는 건 밖에 있다 보니까 요즘 우리국민들의 수준을 잘 몰라서도 하는 얘기 같아요. 7일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북한에 쌀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니까 이명박 대통령도 "국민 수준이 높고 국민도 지켜보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레그가 김대중 대통령과 가까웠기 때문에 천안함 발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는 건 국민의 수준을 정말 무시하는 얘깁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가 7일 발표한 통일의식 설문조사 결과를 봅시다. 천안함에 대한 정부 발표를 믿는 국민이 32.5% 밖에 안 됐어요. 안 믿는 사람은 35.7%, 반신반의 하는 사람은 31.7%. 굉장히 충격적인 결과예요. 여론조사라는 게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긴 하지만,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는 학자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편견 없이 설문을 했을 겁니다. 정부는 그 숫자의 의미를 절대 흘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실체적 진실이 어떻든 천안함과 관련해서 정부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천안함은 이제 이쯤에서 수습을 해야 합니다. 그레그 같은 영향력 있는 인사가 작정을 하고 활동하고 있고,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정부 발표를 믿지 않거나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데 그걸 가지고 어떻게 북한에 사과를 요구합니까? 북한은 남쪽 사람들 100%가 다 믿는다고 해도 사과를 안 하는 사람들이에요. 랑군 사건 때도 증거까지 나오고 용의자가 유죄 판결을 받아도 사과 안 했어요. 그런데도 계속 시인·사과하라고 하면 북쪽에서도 서울대 연구소 발표를 인용할 겁니다.

북한이 천안함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해야 6자회담을 할 수 있다는 건 앞을 내다보지 못한 방침이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절대 만날 생각이 없으면 똑같은 얘기를 계속 해도 됩니다. 그러나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끝나면 6자회담 국면은 서서히 열릴 거라고 봐요. 미국은 이미 다시 중국하고 가까워지려고 하고 있어요. 토머스 도닐런 미국 국가안보 부보좌관이 중국에 가서 다이빙궈(戴秉國) 외교 담당 국무위원을 만났어요. 중간선거 국면에서 미중관계가 나빠진 것에 대해 야당 공화당이 책임론을 제기할 수 있으니까 관계를 복원하거나 최소한 소강상태로라도 만들려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천안함 사과를 대화의 조건으로 거는 건 거둬들이고 수해 지원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복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라당 대표와 특임장관 같은 정권의 실세들이 대북 지원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제 통일부가 움직여서 수해 물자 긴급 구호에 그치지 말고 그걸 더 발전시켜나가면서 한반도 안보 상황을 관리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막상 대화가 시작되면 북쪽에서 어떤 식으로건 유감 표명이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통일부는 외교부가 아니잖아요. 외교부가 그동안 한미동맹에 올인하면서 6자회담과 관련해서 미국의 발목을 잡아 왔는데, 미국도 다시 움직이려 하고 있고 남북간에 기왕에 물밑접촉도 했으니까 이 기회를 통일부가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면 통일부는 앞으로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자기 이름에 맞는 역할을 못 하고 말 겁니다. 차제에 정부 안팎의 강경파들에게 끌려 다니거나 눈치를 보지 말고 대화의 수준을 높여 나가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필요할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영어 속담이 있는데, 북한이 쌀, 시멘트, 굴삭기 달라고 손을 벌렸잖아요. "북한이 이렇게 구체적인 요구를 하는 건 예전에 없던 일이다. 남북관계가 제대로 자리잡아가는 징조다"라고 어떤 정부 당국자가 말했다는 언론 보도를 본적이 있는데, 사실은 과거에도 북한이 필요할 때는 구체적으로 요구했어요. 2004년 봄 용천역 폭발사고 때도 그랬고, 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쌀 외에 농자재를 달라, 비료를 달라 구체적으로 요구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대북 지원을 전혀 안 하다 보니까 '예전엔 없던 일이다'라고 한 모양인데, 좋다 이겁니다. 그런 거 안 따질게요. 내용이야 어찌됐든 그렇게 포장을 하고 합리화하면서라도 대북 지원을 시작하고 남북관계를 복원하라 이겁니다. 천안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북핵 문제 해결 위한 6자회담 재개에 대비해서도 그렇고, G20회의를 위해서도 남북관계를 지금처럼 놔두면 안 됩니다.

북쪽이 수해를 당한 건 안된 일이지만, 그걸 계기삼아 통일부는 통일부답게 나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장관급 회담도 할 수 있고 특사 방북도, 정상회담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기 전에 G20에 앞서서 한반도 안보상황을 관리하면서 국격도 높일 수 있고요.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으니까 '톱 다운(top down)'방식으로 정상회담부터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관계를 빨리 복원하는 길이긴 해요. 그러나 지금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남쪽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정상회담을 안 받을 겁니다. 작년 가을에 이미 한 번 당했기 때문에 실무 책임자들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함부로 건의를 못하게 됐어요. 위험해서. 그러니까 밑에서부터 대화가 시작돼야할 겁니다.

이재오 장관 대북 특사설도 있던데, 적임자는 적임자입니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이 8월 초 평양에 갔던 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한테 '실무선에서 대화를 시작해서 진정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지 않아요. 아마도 북쪽의 이종혁 아태 부위원장 정도가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그게 아마 지금 평양의 입장일 겁니다.

한편, 수해물자를 주기로 한만큼 전달 방식이나 경로를 협의하기 위해서 어차피 적십자회담은 해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통일부가 잘 연구해서 실무선 적십자 회담이 당국 회담으로 발전하고 결과적으로 특사 방북이나 정상회담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초기 상황을 잘 풀어나가기를 바랍니다.



정세현 - 전 통일부 장관,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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