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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두산일기(白頭山日記) - 이중하(李重夏)
이름: 曺 端 * http://www.zoqmin.com


등록일: 2007-11-03 10:49
조회수: 2725 / 추천수: 309


제목 : 백두산일기(白頭山日記)

저자 : 이중하(李重夏)





백두산은 먼 곳으로부터 구불구불 몇 천 리를 동북쪽을 향하여 뻗어와 중국의 동삼성(東三省)에서 우뚝 솟았다.
우리나라 함경도와 평안도 천 리에 걸쳐 굳세게 자리잡고 있어서 아름답고 광대하다. 동남쪽으로는 우리 나라 여러 산의 으뜸이고,
북쪽으로는 영고(寗古), 오라(烏喇) 등이 모두 그 지맥에서 뻗어나간 곳이다. 옛 이름은 불함산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백두산이라 부르지만,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한다.
이는 대개 산이 높고 크며 추운데다 쌓인 눈이 녹지 않아서 사계절 항상 하얗기 때문에 산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다.

해는 광서(光緖) 을유년(1885, 고종 22) 8월
나는 토문 감계사(土門勘界使)의 명을 받았다.

9월
회령에 도착하였다. 중국 감계관 진영(秦煐), 덕옥(德玉), 가원계(賈元桂)와 함께 회령에서 출발하였다.

10월 초6일
무산에 도착하여 백두산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때 날씨가 차고 눈이 쌓여 산에 오르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수행원을 줄이고
식량을 간략히 하였다. 수행원은 단지 안무 중군 최두형(崔斗衡)과 전 오위장 최오길(崔五吉), 전 첨지 이후섭(李后燮), 출신 오원정(吳元貞),
영리 전보권(全普權), 가동 흥업(興業), 근예 춘길(春吉), 응범(應範), 이돌(李乭) 몇 명만 데리고 함께 출발하였다.
모두 가죽 신발과 털 속옷으로 바꾸어 입고 단단히 졸라매었다. 출발할 때 서로 돌아보니 사냥꾼으로 분장한 것 같았다.

10월 10일
삼천(三川)에 도착하였다. 40리를 갔다.

10월 12일
30리를 갔다. 삼하(三下) 강구에 도착하여 말에게 꼴을 먹였다. 중국 관원이 갑자기 다른 의견을 내어, 서두수(纖水)로 가고자 하였다.
이는 대개 우리 나라 정계비의 경계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내가 굳게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고 단지 산에 올라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따르지 않았다. 3일간 논쟁하였고 이에 각기 인원을 내어 세 길로 나누어 감계(勘界)할 것을 정하였다.
우리 나라 종사관 조창식(趙昌植), 전 첨지 이후섭, 화원 김우식(金禹植)은 중국 관원 덕옥(德玉)과 함께 홍단수(紅丹水)를 향하여 갔다.
우리 나라 수행원인 출신 오원정은 중국 화원 염영(廉英)과 동행하여 서두수를 향하여 갔다. 나는 수행원 최두형, 최오길과 중국 관원 진영,
가원계와 함께 백산(白山)으로 향해 갔다. 세 길로 각기 나누어 출발하였는데 서로 전송하면서 떨어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였다.

10월 15일
30리를 가서 홍단사(紅丹祠)에 이르러 제물을 진설하여 사신(祠神)에게 제사하였다. 그 축문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바라건대, 우뚝하고 밝은 산신령은 우리 나라 여러 산의 으뜸입니다. 여러 강물의 근원이 되고 왕업의 기초를 열었으니 주(周)나라
기산(岐山)이나 한(漢)나라 풍(豐) 땅과 같습니다. 비석이 봉우리에 있으니 변경의 끝입니다. 이에 왕명을 받들어 산에 올라 짊어지고 부여잡고
눈 속을 뚫고 바람을 무릅쓰니 저 사람들 마음의 부담이 큽니다. 산신령께서는 우리 어리석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말없이 도움을 내리시어
길이 처음과 끝을 편안하게 하소서.”
물을 떠서 띠를 벤 곳에 뿌리고 조그마한 정을 고하였다. 사당의 편액은 천왕당(天王堂)이라 하였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가 없다.
대개 산신령을 섬기는 곳으로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이다. 사당의 뒤쪽에는 또 세 개의 작은 사당이 있었다. 백산당과 흑산당, 대원당이 그것이다. 흑산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혹 음신(陰神)을 구하는 것인 듯하다.
기도를 끝내고 출발하여 20리를 가서 장파(長坡)에 도착하였다. 여기가 바로 산기슭 입구다. 다시 산에 들어갈 행장을 꾸렸다. 하루를 머물렀다.

10월 16일
비로소 산 입구에 들어섰다. 마을 어른들이 모두 전송하여 수서(水西)에 도착하였다. 읍리 안창준(安昌俊)이 식량과 마초를 짊어졌는데,
말에 싣고 민간의 장정 수십 명을 징발하여 먼저 출발하였다. 우리와 그들이 한 길에 이어졌다. 출발 초기에는 비록 간솔하였지만,
인마가 오히려 70이 되었다. 산 입구에서부터 물을 따라 갔다. 길이 모두 평탄하고 아주 높거나 험한 곳이 없었다.
간간이 수전(水田)을 새로 경작한 지역이 있었다. 나무는 모두 삼나무와 자작나무였다. 자생하기도 하고 저절로 말라 죽기도 하였다.
가장 많은 것은 백선차(白鮮茶)였다. 그런데 본초(本草) 가운데 이것이 어느 나무인지 알 수가 없다. 차맛은 매우 좋았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이는 풀과 나무도 세상 사람들과 잘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40리를 가서 직동(直洞)에 도착하였는데, 머물러 쉬는 막사가 있었다. 사냥꾼들이 자는 곳이다.
그 집의 구조는 양 기둥에 서까래를 걸고 지붕이 없어서 바로 바깥으로 통한다. 앉아서도 하늘을 볼 수 있고 비와 이슬이 흘러 내렸다.
대개는 사냥꾼이 와서 자는데, 불을 때서 추위를 막았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연기와 불꽃이 통하지 않는다.
막사는 몇 곳이 있었다. 온돌은 하나만 있는데 서너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나와 진영, 가원계가 함께 묵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숙하면서
불을 때고 혹은 앉고 혹은 졸았다. 마부와 역에 동원된 장정들은 바깥에서 나무를 잘라 불을 때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듣자하니 이 사람들은 길을 내는 역군으로 전에 입산하여 이처럼 지낸지가 한 달이 넘었다고 한다.
그 배고프고 추운 고생이 사람으로 하여금 측은하게 하였다. 이들은 오히려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산골짜기 백성의 순박함과 윗사람을 섬겨 일에 종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이날 밤 그들과 함께 거처하니, 앉으나 누우나 불편하였다.

10월 17일
참고 있으려니, 날이 밝았다. 밥을 재촉하여 먹고 바로 출발하였다. 새벽달이 희미하게 비추고 잔설이 내리고 있었다.
20리를 갔는데 눈이 더욱 세차게 내렸다. 장산령(長山領)을 넘었는데, 길은 좁고 눈이 덮여서 길이 미끄러우니 일이 걱정스러웠다.
또 20여 리를 가서 가척봉(加隲峯)의 사냥꾼 막사에 도착하였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즉시 출발하여 시내를 따라 갔다.
시내 이름은 월로수(越路水)였다.
10여 리를 가니 연못이 있었는데, 두만강의 발원하는 곳이라고 한다. 또 30리를 가서 절파총수(折把摠水)의 사냥꾼 막사에 도착했는데,
날이 저물었으므로, 여기에서 잤다. 이 막사는 지어진 것이 매우 열악하였고 온돌도 없었다. 하루종일 눈과 싸워 온 나머지 인마가 모두 얼었다.
노천에서 새벽을 기다렸다. 어렵게 하룻밤을 지냈다.

10월 18, 19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30리를 갔다. 이것이 바로 새로 개척한 길이다. 삼나무와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서서 마치 바늘이 찔러대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마구 때렸다. 나무가지를 구부리고 꺾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들이 기울어지고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여 근근이 발을 디디면서 나아가 삼포(杉浦)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바로 둔덕이 끝나는 곳이고 도랑이 처음 넓어지는 곳이다. 진영과 가원계에게 형편을 알려주고 다시 왼쪽 산록의 협곡을 따라 올라갔다.
여기서부터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높이 올라가 산길이 점점 가파르고 쌓인 눈은 더욱 깊었다.
삼포 위로는 개울가에 흙무더기를 쌓아 놓았기 때문에 이를 증표로 삼아 길을 갔다.
30리를 가서 이석포(裡石浦)의 사냥꾼 막사에 도착하여 잤다.
이날 밤 중국 관원 두 사람이 상의하여 우리에게 요청하였는데, 삼경에 밥을 지어 먹고 민정(民丁)으로 하여금 먼저 식량과 마초를 싣고
길을 열어 출발하면 저들과 우리 일행이 뒤따라 출발하여 곧바로 백두산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지금 쌓인 눈이 정강이까지 차고 여기서 백두산까지 거리가 60리다. 깊은 밤에 가는 것은 인명에 관계되니 매우 불가하다.”
라고 하였다. 그가 크게 화를 냈다. 대개 그 뜻은 처음부터 감계에는 뜻이 없고 나에게 행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여 우리가 가는 계획을
정지시키려는 데 있었다.
내가 최두형과 상의하여 드디어 한밤 중에 밥을 짓고 말에게 꼴을 먹이고 일제히 산에 올랐다. 때는 차가운 눈이 흩날리고 달빛은 비쳤다 가렸다 하였다. 그런데 눈을 뚫고 길을 열었다. 대각봉(大角峯) 북쪽 낭떠러지를 따라 올라갔다.
그 옆은 천 길이나 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이 있었다. 한 번이라도 혹 실족하면 생사를 알 수가 없다.
앞서 가며 짐을 짊어진 역부가 이와 같이 추운 혹한에 배가 고프고 얇은 옷을 입었으니 추위에 얼어 쓰러질까 염려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 나무를 베고 산을 뚫고 눈을 뚫어 길을 냈다. 마치 싸움터에 나가 적을 대하는 기세와 같다.
어려운 기색이 조금도 없으니 그 정성이 더욱 감탄할 뿐이다.
나는 몇 리를 걸어 갔다. 그러나 눈이 깊어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오위장 최오길이 말에 올라타 눈을 뚫고 절벽을 따라 나아갔다.
말이 넘어지고 혹 엎어지니 고생이 매우 심하였다. 오직 춘길과 이돌이 나를 뒤따르며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말 위에서 시를 지었다.

男兒宦役摠難謀(남아환역총난모) 남아의 벼슬살이는 모두가 어려운데
夢想那期此遠遊(몽상나기차원유) 이 먼 곳에서 유람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積雪空山三百里(적설공산삼백리) 눈 덮인 텅 빈 산 삼백 리 길을
五更驅馬上峯頭(오경구마상봉두) 오경에 말을 몰아 정상에 올랐노라.

수십 리를 가니 길이 더욱 험하고 눈은 더욱 깊이 쌓였다. 앞서 간 최두형과 수행원 여러 사람이 모두 말에서 내려 눈 속에 섰다.
나도 말에서 내려 민정이 먼저 가서 길을 내도록 시켰다. 조금 후에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관원들의 코고는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아 조금도 움직일 뜻이 없었다. 우리 일행이 일제히 출발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밥을 지었다. 천천히 좇아오는 것이 마지못해 하는 모습이라 또한 가소로웠다.
수십 리를 위로 올라갔다. 삼나무도 점점 드물어졌다. 마침내 산꼭대기에 도착하였다.
한 포기의 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텅 비고 거친데 눈빛은 한결같이 흰 것을 깔아 놓은 듯했다.
이 때는 하늘 빛이 아직 밝지 않아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 산의 모습이 점차 분명해지고 동쪽이 이미 밝아졌다.
찬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고 온 하늘이 흐릿하여 백두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정말로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계비가 있는 곳도 역시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무산 사람 이종려(李宗呂), 김이헌(金利憲), 황학채(黃鶴采) 등은 평소 산길에 익숙하다고 하여 처음부터 앞에서 인도한 사람이다.
그런데 민부(民夫) 등과 더불어 방황하면서 길을 찾아 헤매어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저들과 우리 일행이 모두 산 위에서 말을 세우고 있었다. 눈바람이 몰아쳐 안주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음이 멍해지는가 싶더니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둥글고 붉은 해가 동쪽 하늘에서 떠올랐다.
백두산이 짧은 순간에 눈앞에 전개되어 언덕, 골짜기를 낱낱이 볼 수가 있었다.
이때 마치 취했다가 깨어난 것 같기도 하고 눈이 멀었다가 밝아진 것 같기도 하니 모두 하늘과 신의 조화라고 하겠다.
나도 경이로워서 시 한 수를 지었다.

大冬持節白頭山(대동지절백두산) 한 겨울에 왕명 받고 오르던 백두산 길
風雪難分咫尺間(풍설난분지척간) 풍설이 흩날려서 지척조차 분간하기 어렵더니
頃刻豁然天宇霽(경각활연천우제) 잠깐 사이 탁 트여서 하늘이 맑아지자
一輪紅日着山顔(일륜홍일착산안) 뚜렷한 붉은 해가 산 위에 걸렸구나.

멀리 백두산 전체를 보니 아침 해가 쌓인 눈을 밝게 비추었다. 밝게 빛나고 조용한데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다.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가득 어우러져 하늘에 솟아 있다. 마치 수정으로 만든 궁전과 같고 옥으로 지어진 세계와 같다.
사람의 마음과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아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며 공경하게 하고 삼가하여 두렵게 만들었다.
마침내 서로 정계비(定界碑)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나아갔다. 높은 산과 골짜기가 매우 많았다.
하늘에서 부는 바람이 눈을 날려 곳곳에 쌓여 있다. 쌓인 것이 몇 천 년을 계속 내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매 번 이 계곡에 올 때마다 마치 깊은 바다를 건너는 듯했다. 사람들이 모두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
말이 쓰러지고 사람이 넘어져 괴로운 곳이 몇 곳인지 모르겠다.
옛날의 험하고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말을 모는 것도 이것에 비하면 오히려 편안히 다닐 수 있는 길이다.
내가 너무 피곤하여 춘길과 이돌이 좌우에서 부축하였다. 그들도 또한 힘이 빠지자 중군 최두형이 또 부축하여 겨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정계비가 있는 곳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30리 거리였다. 정계비가 세워져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공중의 세계로서 사방이 훤히 트였다. 오직 운무만이 깔려있을 뿐 어떠한 사물도 그 사이를 차단하지 않았다. 내가 시를 지었다.

天際峯頭咫尺分(천제봉두지척분) 하늘 끝과 산봉우리 지척에서 구분되니
瑤臺仙藥若將聞(요대선약약장문) 요대의 선약 찧는 소리 들리는 듯하네.
層巖仍積千年雪(층암잉적천년설) 층층 바위엔 천년 눈이 그대로 쌓여 있고
下界長鋪萬里雲(하계장포만리운) 하계에는 만리 구름 길게길게 깔려 있네.
箕子舊邦開小域(기자구방개소역) 기자의 옛 나라가 조그맣게 열려 있고
康熙短碣記遺文(강희단갈기유문) 강희제가 남긴 글이 비석에 남아 있네.
伏波銅柱終無計(복파동주종무계) 복파 장군 세운 비석 끝내 어찌할 수 없으니
撫劒西風送夕曛(무인서풍송석훈) 칼 어루만지며 서풍에 저녁노을 보내노라.

이 봉우리는 사각(四角)인데 듣자니 중앙에 커다란 연못이 있다. 둘레가 80리나 된다고 한다.
항상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연못 가운데서 피어 올라 하늘에 가득 찼다.
대개 산의 연못은 변화가 끝이 없다.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10여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는데, 바람과 눈이 하늘에 가득해 올라가 볼 수 없어서
매우 유감이었다.
동쪽 봉우리 셋째 산기슭을 따라 계곡을 지나니 땅이 조금 평평해지며 양쪽으로 커다란 계곡이 나누어 펼쳐진다.
서쪽은 바로 압록강의 근원이고, 동쪽은 곧 토문강의 근원이니, 참으로 분수령이다.
그 분수령 가운데에 조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 위에는 가로로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가 씌어 있고, 그 아래 기문(記文)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오라 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경의 경계를 조사하고자 이곳에 도착하였다.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鴨綠)이고 동쪽은 토문(土門)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한다. 강희(康熙) 51년(1712) 5월 15일 필첩식(筆帖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 조태상(趙台相), 차사관 허량(허량), 박도상(박도상), 통관 김응헌(金應瀗), 김경문(金慶門).“

비석의 동쪽 가에는 골짜기를 따라 인공 둔덕이 설치되어 있는데, 혹은 돌이나 흙으로 쌓아서 삼포(杉浦) 90리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는다.
옛 사람들의 힘쓴 것을 생각해보니 그 매우 크다. 비석의 표면에는 얼음 파편이 엉겨붙어 있어서 깍아내도 떨어지지 않아 불을 피워 녹인 뒤,
3장을 인출(印出)하여 그 중 한 장은 장영에게 주고, 나머지 두 장은 품속에 넣었다.
이 때 음산한 바람이 더욱 심해지고, 눈꽃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일어나 길을 되돌려 오는데, 겨우 수십보를 가자
길이 흐릿해져 찾을 수가 없었다.
가차을봉(可次乙峯)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어두컴컴하고 망망하여 큰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아서 그 끝을 볼수가 없었다.
길을 가리키는 여러 사람들이 그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다.
각자 길을 찾아 갔는데, 그 행렬을 멀리 바라다보니 어부가 새벽에 포구에 드는 것 같아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스럽게 하였다.
혹은 남쪽으로 몇리를 가서 낭떠러지와 골짜기로 막혀서 망연히 되돌아오고, 혹은 동쪽으로 몇리에 이르러 등성이와 언덕이 아득히 넓어 두려워 되돌아 왔다.
한갓 보이는 것이라곤 운무만 자욱하고,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므로 상하간에 어두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하늘 빛은 어느덧 점차 어두워 일행의 인마가 하루 낮 밤을 굶주리고 피로한 나머지 더욱 마음이 두려워지고 얼굴은 사람의 얼굴색이 아니었다.
청나라 관원 가원계도 또한 두려워 떨면서 손에 나침반을 들고, 단지 통사 권흥조를 부르며 말하기를,
“어느쪽이 동남쪽인가?”
라고 하며, 그치질 않는다. 통사 또한 입과 입술이 바짝 말라 중군 최두형을 향해 말하기를,
“영감, 영감, 내가 어찌해야 합니다까?”
라고 하였다. 허다한 인부들이 단지 통사가 앞에 가는 것만 믿고 따라가는데, 통사는 걸음걸음마다 고심하며 능히 방향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이 때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길을 찾는 것은 굳이 바라지 않고, 단지 바라는 것은 수목이 있는 속을 찾아서 불을 피우며 밤을 지새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눈을 씻고 사방을 바라보아도 나무 하나 보이지 않으니, 바로 막다른 오지였던 것이다. 각자가 하늘을 찾고 아버지를 부를 따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남쪽에서 하늘 빛이 잠깐 열리며 여러 개의 봉우리들이 반쯤 드러났다.
길을 잃고 하루의 반이 지난 동안에 비로소 산의 모습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며 서로를 향해 축하하기를,
“하늘이 나를 살렸는가? 산신령이 나를 살렸는가?”
하면서 말끝마다 칭송할 뿐이었다. 비로소 생기가 돌아 통사로 하여금 어디로 가야할 지를 분간하도록 하니, 곧 말하기를,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봉(竪峯)을 향하여 내려갔다. 눈이 깊어 거의 무릎 위까지 찼으나, 살길을 찾았기 때문에 고생스러운지를 몰랐다.
이리저리 찾아 수봉의 막사에 이르렀는데, 날은 아직도 저물지 않았다.
이 날 모두 백여 리를 갔는데, 사람과 말이 모두 굶주리면서도 모두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으니, 어찌 인력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곧 왕령(王靈)이 지켜주신 것이리라. 내가 시 한 수를 지었다.

雪滿空江月滿天(설만공강월만천) 눈 내려 빈 강에 가득하고 달은 하늘에 가득한데
飄然立馬白山嶺(표연입마백산령) 표연히 백두산 봉우리에서 말을 세웠네.
殆非人力能來此(태비인력능래차) 사람의 힘으로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全仗王靈直向前(전장왕령직향전) 온전히 임금님의 영험이 앞으로 인도함이었네.
拓地于今無李牧(척지우금무이목) 땅을 개척하려 한들 이제는 이목 같은 이가 없고
窮源從古說張騫(궁원종고설장건) 근원을 찾는 데는 예로부터 장건을 말하였네.
玉樓是夜寒何似(옥루시야한하사) 궁궐은 이 밤에 얼마나 차거우실까
回首觚稜杳一邊(회수호릉묘일변) 머리 돌려 궁궐을 바라보니 한 곳이 아득하여라.

또 시 한 수를 지어 신령의 도움에 감사를 드렸다.

密霧陰雲鎖萬重(밀무음운쇄만중) 짙은 안개 음산한 구름 만 겹이나 잠겼으니
深山日暮失歸踪(심산일모실귀종) 깊은 산에 날 저물어 돌아갈 길 잃었어라.
天門忽闢東南角(천문홀벽동남각) 하늘 문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열리더니
指路分明露數峯(지로분명노수봉) 여러 봉우리 드러나서 길이 환히 밝도다.

막사가 매우 좁고 추워서 노천이나 다름이 없었다. 불을 피우고 밤을 보냈다.

10월 20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신무충(申武忠)의 사냥꾼 막사에 닿았다. 가는 길이 평탄하였는데 이를 천평(天坪)이라 하였다.
여기가 바로 백두산 전면의 명당 자리였다. 너비가 거의 100리나 되었고 수목이 울창하였다.
만일 기후가 차고 서리가 일찍 내리는 땅이 아니라면 큰 도시를 세울 만한 곳이다.
산 속의 여러 갈래의 물은 끊기기도 하고, 흘러가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대개 이 산의 많은 물이 모두 돌 밑으로 흐른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닌 듯하다.
이 사냥꾼 막사는 중국인 동씨(董氏) 성을 가진 자의 막사였는데, 지은 것이 우리 나라 사람의 사냥꾼 막사에 비하여 자못 정밀하고 깨끗하여
쉴 만하였다.

10월 21일
다음 날 50리를 가서 다시 가을척봉(加乙隲峯)의 사냥꾼 막사에 이르러 잠시 쉬고 곧바로 출발하였다.
직동의 사냥꾼 막사에 이르니 밤이 이미 삼경이었다.
장파의 어른들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환영하면서 위로하니 그 뜻이 가상하였다.

10월 22일
다음 날 아침 즉시 출발하여 장파로 돌아오니, 22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10월에 백두산에 가는 행차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으니 어찌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사이의 산행은 불과 7일이었다.
그런데 지나간 일을 회상하니 마치 세상에서 떨어져 있던 사람이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온 듯했다.

10월 25~27일
3일 동안 푹 쉬었다.

10월 25일
출발하였다.

10월 27일
무산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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